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케다야 사건 (문단 편집) == 상세 == [[시모노세키 전쟁]]과 <8.18 정변>으로 조슈는 교토에서 실각한다. 서양의 포격에 놀란 [[고메이 덴노]]가 [[산조 사네토미]] 등 [[쿠게|양이파 교토 귀족]]을 실각시켰고 이어 [[쿠게|공무합체파(친 막부파) 교토 귀족]]들이 집권한다. 막부 측의 교토 수호직인 [[아이즈 번]]과 [[사쓰마]]가 손을 잡자 도막파(반 막부)였던 쵸슈는 완전 고립된다. 당시 교토에서 양이파 탈번 낭인들이 막부 측 인사나 개국파를 죽이고 다니자 아이즈 번도 [[낭인]]들을 조직화해 유신 지사들을 즉결처분하고 다녔는데,[* 아이즈번의 [[신선조]]가 대표적인 예.] 그 와중에 조슈 번사들과 양이파 탈번 무사들이 산조 키야마치(三条木屋町)의 이케다야(池田屋)라는 여인숙에 모여 여러 차례 작당 모의를 했다. 6월 5일 [[신선조]]의 부장 [[히지카타 토시조]]는 조슈 번의 지사 [[https://ja.wikipedia.org/wiki/古高俊太郎|후루타카 슌타로]]를 체포한다. 그는 원래 중고상으로 신선조는 그의 점포에서 갑옷과 [[조총]], 그리고 조슈 번 사람들로부터 받은 편지들을 압수했다. 심한 고문 끝에 조슈 번의 지사들이 [[https://ja.wikipedia.org/wiki/一会桑政権|이치카이소 정권]] 요인[* 교토 수호직 '''[[마츠다이라 카타모리]]''', [[https://ja.wikipedia.org/wiki/禁裏御守衛総督|금리어수위총독]](교토 어소와 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오사카만|오사카만]]을 방어하는 직책) '''[[도쿠가와 요시노부]]''', 교토소사대(교토 치안 담당)이자 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구와나번|구와나 번]] 번주 '''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마쓰다이라_사다아키_(1847년)|마쓰다이라 사다아키]]''', 황족 '''[[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]]''']들을 암살하고, '''교토에 불을 지른 사이''' [[마츠다이라 가타모리]]를 암살하고 [[고메이 덴노]]를 쵸슈로 납치하려한다는 자백을 받아낸다.[* 그러나 일각에서는 히지카타가 조슈 번의 지사들을 토벌하기 위해 이 자백을 조작했다는 설이 있다. 납치를 모의했다는 내용이 막부 측의 기록에서만 등장하기 때문이다. 게다가 이 때 자백을 한 후루타카가 얼마 안 있어 일어나는 [[금문의 변]] 때 죽게 되면서 진실을 확인할 방법마저 사라진다.][* 목조건물이 밀집한 당시 일본의 특성상 아무리 소방설비와 인력을 갖추어도 잠깐의 화재로 도시가 전소될 위험이 있었던지라 [[방화죄]]는 미수조차도 극형으로 다스릴정도로 인식이 안좋았다. 요즘으로 치자면 테러행위와 같은 것이었기에 진위여부를 떠나 이 일로 한동안 유신지사들의 인식이 상당히 안좋아졌고, 신센구미는 테러로부터 도시를 지킨 것으로 유명해져 막부로부터 확실한 인정과 지원을 받게 된다.] 7월 8일 국장 [[곤도 이사미]]는 신선조를 출동시켜 이케다야를 급습한다. 신선조는 이 과정에서 대원 1명을 잃고[* 사망한 대원은 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오쿠자와_에이스케|오쿠자와 에이스케]]. 사건 당시 곤도 이사미 부대 소속이었다.] [[토도 헤이스케]]가 부상당했으며, 조슈 번은 7명이 죽고 24명이 체포된다. 그 탓에 쵸슈는 교토에서 아예 활동은 커녕 역적 신세를 면키 어렵게 됐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